K-pop 아이돌의 무대를 보면서

뉴진스의 무대를 볼 때마다 하니라는 멤버가 눈에 들어온다. 특별하게 튀지도 않으면서 혼신을 다해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K-pop 아이돌그룹의 칼군무를 생각해보면, 누구 하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음악가들을 볼 때마다 드는 느낌 역시, 튀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세련되고 섬세하다는 것이다. '사회화'가 매우 잘 되어있는 인간이다. 그래서 혼자 무언가를 하기보다, 그룹댄스나 그룹연주 같은 '협동예술'을 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뭔가 특별한 습관이나 태도를 심어줄 것 같다. 그래서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어릴 때부터 그룹 연주나 그룹 댄스와 같이 **'타인과 호흡을 맞추는 훈련'**을 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사회적, 정서적으로 매우 중요한 태도와 습관을 형성해 줍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핵심적인 몇 가지를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자기 조절'과 '전체 흐름'을 읽는 태도 그룹 활동의 핵심은 내가 아무리 잘해도 남보다 빠르거나 튀면 전체가 망가진다는 점입니다. 억제와 조절: 내가 더 크게 연주하고 싶거나 더 돋보이는 동작을 하고 싶어도, 전체의 균형을 위해 나를 낮추고 박자를 맞추는 법을 배웁니다. 경청과 관찰: 연주자는 옆 사람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무용수는 옆 사람의 동선을 눈으로 쫓아야 합니다. 이는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깊은 **집중력(Mindfulness)**으로 이어집니다. 2. '책임감'과 '상호 의존성'의 습관 나의 실수가 그룹 전체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은 강력한 책임감을 심어줍니다. 역할 완수: "내가 내 몫을 하지 않으면 팀이 멈춘다"는 인식을 통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이 몸에 뱁니다. 공동체 의식: 내가 힘들 때 동료의 도움을 받고, 동료가 흔들릴 때 내가 박자를 잡아주는 과정을 통해 **'함께일 때 더 ...

소통불능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맺어주는 다리가 되는 소통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자신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의미와 정보 중에서 일부를 말로 표현해야 하는데, 어느 부분부터 말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하는 문턱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많은 정보를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이미 이해하고 있거나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표로 전환하는 문턱이 높을 것이고, 반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표로 전환하는 문턱이 낮을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기질에 따라 기표전환문턱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상황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대화내용 field: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느냐? 대화상대 tenor: 누구와 이야기하느냐? 대화방법 mode: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하느냐? 사실 이 따분한 소통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일상적인 대화도구가 된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가끔 경험하는 어색한 분위기에 대해 좀더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더 가깝게 연결해준다는 도구가 오히려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나의 경험을 기초로 정리해본다.  field: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다를 수 있다. 내가 관심없는 주제에 대해 모두들 떠들고 있을 때 가끔은 대화에 참여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대화에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 자발적 선택이지만, 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나도 한 마디 거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관심없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겉돌기 마련이고 무리하게 주제전환topic shift를 시도하다가 원망을 사기 쉽다. tenor: 카카오톡에서는 현실의 관계가 그대로 전이된다. 물론 카카오톡은 모든 말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말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현실에서 매우 가까운 사람과 카카오톡을 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가깝다고 말을 막했다가 오해를 살 수도 있고, 문제가 될 수도 있...

역사는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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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카의  《 역사란 무엇인가 》 이 책의 명성을 익히 알기에 드디어 도전을 하고 있다. 같은 번역가로서 정말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번역이 개쓰레기다. 이번 주에는  《 역사란 무엇인가 》  3장을 읽었다. 3장을 읽고 내 나름대로 이해한 것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핵심주장  역사는 과학이다 경험자료( 사실 )를 바탕으로 원리를 탐구하고, 원리를 바탕으로 경험자료를 수집한다는 측면에서 역사와 과학은 연구방법이 같다. 하지만 전통적인 학자들은 여전히 역사는 과학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데 카는 이러한 주장을 다섯 가지로 정리하고 이에 대해 반박한다. 반론1  역사는 특수한 사건을 다룬다 과학은 보편적 현상을 다루지만 역사는 개별적인 사건을 다루기 때문에 과학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개별적인 인물, 사건을 수집하는 것을 역사라고 보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역사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개별사건들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원리를 끄집어내는 학문이다. 개별사건에 집착하는 것은 역사연구자라기보다는 잡학지식수집가에 불과하다. 반론2  역사를 알아봤자 아무 쓸모가 없다 역사가 특수한 사건만 다루는 잡학지식수집에 불과하다면, 역사는 쓸모없으며, 교훈도 줄 수 없다. 하지만 다양한 사건들을 연구하여 원리를 밝혀낸다면, 당연히 현실적인 교훈을 줄 수 있다. 반론3  역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역사가 특수한 사건만 다루는 잡학지식수집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는 미래를 예측하는 데 유용한 지식기반이 될 수 있다. 반론4  역사는 객관적일 수 없다 주관적인 인간이 주관적인 인간의 일을 관찰하는 것이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느냐는 말은 그럴 듯해보이지만, 물리학에서조차 오늘날 주체-객체 2분법은 무너지고 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객관적 객체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역사가 과학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반론5.1  역사는 종교와 뒤섞일 수 있...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개방성과 확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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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권》 로마가 건국되어 기틀을 잡아가는 과정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알게 된 인상깊은 사실은, 로마인들이 원래부터 뛰어난 부족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지성은 그리스보다 떨어지고, 체력은 켈트보다 떨어지고, 기술력은 에트루리아보다 떨어지고, 경제력은 카르타고보다 떨어졌다. 그럼에도 다른 모든 부족들을 물리치고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의 부족함을 채워줄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개방성 때문이었다. 로마는 여자를 얻기 위해 사비니를 약탈/합병하고,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라틴을 통합하고, 에트루리아를 편입하였는데, 신기한 것은  왕정 시대 일곱 왕들 중 다섯 왕이 사비니와 에트루리아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왕위는 자신의 혈통이 이어나가야 한다'고 고집하지 않는 것은 동양의 역사관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테베레강 언덕에서 농사 짓던 무식하고 힘쎈 농사꾼들이 세운 나라가 전세계를 호령하는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바로 이러한 파격적인 '개방성' 때문이었다. 또한 그러한 개방성이 공정하게 작동할 수 있도록 로마인들은 오랜 세월 사회/정치제도를 갈고닦았을 것이다. 그 결과, 가장 효율적인 정치체제를 만들기 위해 왕정에서 시작하여, 공화정으로 넘어갔다가, 제정까지 나아간다. 너무 똑똑하여 뭐든 혼자서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 잘 할 줄 아는 것은 없지만 그것을 대신 해줄 수 있는 사람을 잘 찾는 사람이 성공하기 마련이다.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기득권만 안위를 누릴 수 있는 공고한 체제(e.g., 학벌과 부동산)를 깨부수고 사회발전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새로운 인재들, 이민자들, 또 AI를 비롯한 새롭게 등장할 기계인간들을 적극적으로 사회운영의 핵심동력으로 포섭해야 한다. 놀라운 개방성 속에서도 로마는 끝없는 영토확장을 통해 얻은 부를 인재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줌으로써 사회안정을 이루고 발전해나갔다. 지금은 끝없는 기술개발과 시장확대와 수...

학대와 호혜

어린 시절 학대와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성향 어릴 적 학대나 방임의 경험이 성인이 되었을 때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성향(Self-sacrificing behavior)'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심리학적으로 매우 빈번하게 관찰되는 현상입니다. 이는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했던 '생존 전략'이 고착화된 결과로 봅니다. 왜 이런 성향이 만들어지는지, 그 심리적 메커니즘을 네 가지 핵심 포인트로 정리해 드립니다. 1. 생존을 위한 '과도한 순응' (Fawning Response)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전문가인 피트 워커(Pete Walker)는 투쟁(Fight), 도주(Flight), 경직(Freeze) 외에 '복종/비굴(Fawn)'이라는 네 번째 반응을 제시했습니다. 학대 상황에서 공격하거나 도망갈 수 없는 아이는 가해자의 기분을 살피고, 요구를 완벽하게 들어줌으로써 폭력을 최소화하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상대의 기분을 맞추는 것이 안전하다"는 학습이 뇌에 각인되어, 성인이 되어서도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기 욕구를 버리고 희생하는 패턴을 보입니다. 2. 낮은 자기 가치감과 '조건부 사랑' 학대받은 아이는 자신이 존재 자체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대신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어야만, 혹은 나를 희생해야만 쓸모 있는 사람이다"라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이들은 타인의 인정을 받기 위해 자신의 에너지를 바닥날 때까지 쏟아붓는 '피플 플리저(People-Pleaser)'가 되기 쉽습니다. 3. 경계(Boundary) 설정 능력의 상실 정상적인 양육 환경에서는 아이가 "싫어"라고 말하며 자신의 경계를 세우는 법을 배웁니다. 하지만 학대 환경에서는 아이의 경계가 처참히 무너집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몸에 대한 주도권을 가져본 적이 없기에, 성인이 되어서도 타인의 무...

인간관계의 기본원리: give and take

인간관계에서 호혜성 원칙(Reciprocity Principle)은 단순한 에티켓을 넘어, 관계의 지속 가능성을 결정하는 '심리적 골격'과 같습니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는 이 원칙이 무너질 때 관계는 급격히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호혜원칙이 인간관계 유지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드립니다. 1. 관계의 신뢰도와 예측 가능성 호혜성은 상대방이 '나를 이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를 형성합니다. 내가 호의를 베풀었을 때 상대가 반응한다면, 우리는 그 관계를 안전하고 예측가능한 것으로 인식합니다. 심리적 부채감: 인간은 호의를 받으면 이를 갚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부채감 을 느낍니다. 이를 적절히 해소하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관계의 결속력이 강해집니다. 2. 정서적 균형과 '사회적 교환 이론' 심리학의 사회적 교환 이론(Social Exchange Theory)에 따르면, 사람들은 관계에서 얻는 보상(기쁨, 도움)과 비용(시간, 노력)의 균형을 맞추려 합니다. 불균형의 결과: 한쪽만 계속 베푸는 '일방통행'식 관계는 주는 사람에게는 정서적 소진(Burnout)을, 받는 사람에게는 미안함이나 부담감을 줍니다. 결국 비용이 보상보다 커지는 순간, 인간관계는 정리단계에 접어듭니다. 3. 진화론적 생존 전략 인류학적 관점에서 호혜성은 생존을 위한 필수전략이었습니다. 협동하는 집단이 생존확률이 높았기에, 호혜성을 지키지 않는 이른바 ' 무임승차자(Free-rider)'를 경계하고 배제하는 유전자 가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즉, 호혜성을 지키지 않는 것은 사회적 동물로서의 '자격'을 의심받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 주의할 점: '거래'와 '관계' 사이의 선 타기 호혜성이 중요하다고 해서 모든 호의를 1:1 장부 기록하듯 되갚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친밀한 관계: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 사이에서는 ...

번역가의 삶 1

지금은 AI의 도움을 받아 번역을 그나마 조금 쉽게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번역은 배우기가 매우 까다로운 일 중 하나였습니다. 제대로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읽고 쓰는 능력 위에, 수준 높은 외국어 해독능력을 쌓아야 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비판적 탐구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능력 중 어느 것도 1-2년 노력한다고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긴 시간, 갈고 닦아야만 얻을 수 있는 고차원적인 능력이죠. 물론 이 세 가지 능력을 갖추었다고 해서 번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들,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한 자리에 앉아서 읽고 쓰는 작업을 긴 시간 쉬지 않고 반복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가벼운 책이라고 해도 300쪽 정도 되는 책 한 권을 번역하려면 최소 6-7주는 걸립니다. 분량이 조금 되거나, 책 속에 담겨있는 정보가 복잡하거나 지식수준이 높은 책은 3개월이 넘어가기 일쑤입니다. 혹시 드라마 같은 데 나오는 멋진 번역가를 상상하시면 안 됩니다. 낮에는 한가롭게 산책을 하며 여유를 즐긴다던가, 노트북 하나만 들고 여행을 하면서 틈틈이 번역을 한다던가, 그런 그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6-7주 동안 한 권을 번역하려면 하루 10시간씩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책상 앞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토요일 일요일 그런 것도 없습니다. 공휴일도 없고 쉬지 않고 일해야 합니다. 물론 경력이 쌓이고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면 작업속도가 조금 빨라지기는 하겠지만, 극적으로 빨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 8시간 정도만 일해서 마감을 할 수 있다면, 그나마 자리잡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번역을 한두 권하고 나면, 절반 이상은 때려 칩니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삶이 피폐해지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시간관리를 해야 하는데, 이런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계획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밀린 작업을 따라잡기 위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일을 하다보면...

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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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독서모임에 내가 추천한 세 권 중 하나. 오늘 아침 독서모임에서 발제했다. 표지에 실린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하여, 어떤 내용인지는 자세히 보지도 않고 추천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화제는 다음과 같다. 문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 주제를 가지고 현재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문명의 이기들을 맨바닥부터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설명한다. 물론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작동원리나 기계적 구조도 알아야겠지만, 그보다 그런 기술이 왜 필요한지, 왜 중요한지, 그 바탕이 되는 기술의 발전과정도 알아야 한다. 결국 기술을 중심으로 인류문명이 진보한 역사를 보여준다. 물론 흥미를 끌기는 하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금세 지루해질 것이다. 온갖 지식과 기술의 목록을 늘어놓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재미있는 서사장치를 하나 삽입한다. 예컨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하다가 타임머신이 고장나 과거의 어느 시점에 조난당했다면, 그 시점부터 문명을 나 스스로 건설해 생존을 도모하라고 말한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생존매뉴얼이다. 물론 이러한 시나리오를 부과했음에도 그 분량과 방대한 지식의 목록에 압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조금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책을 읽어나간다면 잡다한 지식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 말발굽에 편자를 박는 이유, 농사를 지을 때 콩을 심어야 하는 이유, 송전선과 변압기의 기능, 숯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증류를 이용해 깨끗한 물을 얻는 방법 등 흥미로운 정보들을 알아가는 쏠쏠한 재미를 준다. 백과사전을 하루종일 들춰보던 어릴 시절에 이 책을 봤다면 정말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증기기관 발명과정.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서도 최소 2000년이 걸렸다. 저자는 문자기록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무수한 기술과 도구들이 두 번 발명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많은 기술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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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가기 전 공장을 다닐 때, 나도 정주영처럼 큰 돈을 버는 재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적이 있다.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앞에 갈 때마다 리어카에서 파는 자기계발서들을 사서 읽었다. 미국책들을 날림으로 번역한 책들이었다. 30살, 40살 50살에 이룰 업적을 계획했고, 그때마다 소유한 자산을 액수로 써놓았다. 얼마전 넷플릭스에서 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 세상에 "멀티버스"가 존재한다면, 그 때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상한다. 물론 그런 상상을 진지하게 한다면, 현실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는 뜻일게다. 영화 속 에블린이 그렇고, 내가 그렇다. 대학을 가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나의 처지와 상황을 좀더 주체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좀더 행복한 삶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앞에 펼쳐진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물론 그 뒤에도 수많은 선택을 했고, 그 결과로 지금 이 상황에 도달했을 것이다.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 좋은 것 같지만,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남의 시선과 시류에 휩쓸리기 쉽다는 뜻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거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할 때 비로소 목숨을 건 성장과 발전이 시작된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가능성을 줄여나간다. 이제 선택지는 매우 좁혀졌다.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좁혀갈 것이다. 선택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무수한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선택지는 포기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무수한 선택을 했다는 뜻은, 나에게 열려있던 수많은 가능성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갓태어난 아기들이 사랑스러운 것은, 앞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둘 나이를 먹으면서 선택지는 줄어든다. 나의 길이 아닌 것은 포기한다. 천진난만하던 얼굴이 하나둘 흠집이 가고 구겨진다. 이제 나는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멀티버스는 개뿔.

2륜차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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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뉴스에서 김정기화백이 프랑스에서 리얼타임 드로잉쇼를 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고 감동을 받았는데 ,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뜬금 없는 뉴스가 나왔다. 이제서야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화백이 새상을 뜨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찾아보니 콜로소에 화백이 남겨놓은 온라인 드로잉클래스가 있어서 거액을 들여 구입했다. 구입해놓고 1년 넘게 묵혀 놓다가 이제라도 주말에 한 강좌씩 익혀나가고 있다. 오늘 강의는 5강 "2륜차 그리기"였다. 2시간이 넘는 강의를 들으며 그린 그림을 올린다.

창조성과 낙관성

몇 년 전 '노동자들의 특유의 낙관성'이라는 말을 들었다. 자본가나 유산자들은 염세적인 반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무산자들, 자기 손으로 무엇이든 직접 만들어내 먹고 사는 노동자들은 세상을 비관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노동과 낙관적인 태도는 과연 상관관계가 있을까?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뭔가 틀린 말 같기도 한 이 명제는 오랫동안 나의 뇌리를 맴돌며 화두가 되었다. 그러다 뭔가 초점이 잘못 맞춰졌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낙관성은 '먹고 사는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무엇이든 직접 만들어내'는 것에서 나온다. 이것은 현대적 의미의 노동 labor 이 아니라 고전적인 노동 work 을 말하는 것이다. work는 '노동'보다는 '창조'에 가까운 말이다. 무언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실패하더라도, 이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무수한 길 중 하나의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테스트해보지 않은 도전기회가 99개 남아있기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되려면, 창조적이어야 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나 스스로 상상하고 구현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낙관적일 수밖에 없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는다. 부동산에 목을 매는 사람들, 부동산으로 편안하게 부를 만들어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대개 창조적이지 못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낙관적일 수 없다.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사람들에게 기존의 질서는 유일한 구세주다. 그 틀 안에서, 정해준 방식대로, 열심히 기어올라,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것이 최상의 락 樂 이고 보람이다. 여기서 추락하면 삶의 의미가 사라진다. 자살을 선택한다. 우리나라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어떤 난관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창조성 때문이지 않을까? 오랜 역사를 통해 파괴와...

곶감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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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유튜브에서 곶감을 만드는 것을 보고 나도 한 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곶감용 고봉시 두 박스를 G마켓에서 6만원 정도에 구매하고 곶감걸이는 2만원 정도에 구매했다. 이 정도 돈을 쓰고 곶감 130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수지맞는 일이지만, 감을 일일이 깎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2시간이 넘어가니, 이 고생을 하느니 사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완성된 곶감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감을 깎고 곶감걸이에 걸고 나니 5시간이 넘게 걸렸다. 처음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후반부에는 요령이 생겨 속도가 붙었다. 역시 단순반복노동은 머리속을 깨끗하게 비워준다. 이제 곶감을 먹기 위해서는 2주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주는 음식 앞에 나도 모르게 경이로움과 겸손함을 느낀다. 곶감이 제대로 만들어지려나? 한껏 기대가 된다.

2026년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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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교 아래 한강변에서 본 일출 2026년 1월 1일 아침 6시 30분 일어나 행주산성에서 일출을 보러 가기로 했다. 몇 년 전 속초에서 1월 1일 동해 일출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차도 너무 막히고 숙박도 너무 비싸서 여행으로 얻은 감흥 대비 비용이 너무 컸다. 올해는 지음이가 왠일인지 새해일출을 보고싶다고 하여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중 집에서 가까운 행주산성 일출이 볼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서 차로 15분 밖에 안 되는 곳이니 여유있게 가면 되겠다 싶어 6시 50분 정도 출발했는데, 아...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구나... 금방 깨달았다. 행주산성 초입부터 차가 많아지더니 막히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차를 댈 주차장을 찾지 못해 다시 집으로 가야 하나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다 거의 행주산성길 거의 마지막 지점에서 운좋게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겨우 찾았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행주산성에 입장할 수도 없었다. 일출을 보러 온 사람이 너무 많아 입장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나 망설이다가, 사람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일단 따라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위 사진을 찍은 곳이다. 일기예보상 일출은 7시 48분이었지만, 10분이 지나도 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는 해가 안 보이는가보다...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 8시 정도 되었을 때 누군가 만세를 불렀다. 한강가로 최대한 나가니 행주산성 언덕 뒤로 해가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2026년 새벽, 부푼 꿈을 안고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소중한 바람이 모두 이뤄지기를 바란다. 나의 올 한 해 개인적인 소망은 출판 사업매출과 순익을 끌어올려 성장궤도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더욱 화목한 가족이 되길 바란다. 해 뜨는 것을 보고 나서 '그 유명한' 행주산성 원조잔치국수를 거의 한 시간 줄을 서서 먹었다. 맛은 별로 없지만 양은 무지 많이 준다. 집에 돌아오니 10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협심증?

한 15년 전 쯤엔가? 강의를 하다가 가슴 중앙에서 약간 왼쪽 지점이 갑자기 뻐근해지는 통증이 느껴졌다. 낮선 통증에 흠칫 놀랐으나 숨을 한번 크게 쉬니 통증이 서서히 풀렸다. 그것이 무슨 증상인가 궁금해 하던 중 "협심증"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제 40대 초반인데 죽을 때가 온건가... 결혼도 못하고 죽는 건가... 온갖 상념에 휩싸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통증도 다시 오지 않아 잊고 지냈다. 아마도 그거였다. 하지만 잊고 살 만 할 때쯤 그 증상은 다시 찾아왔다. 아마도 1-2년에 한 번 정도, 뜨문뜨문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운동을 다시 시작하였고, 한두 달 지나면 흐지부지 그만 두기를 반복하였다. 요즘엔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자전거 타기를 하고 있는데, 오늘 저녁 재활용쓰레기를 버리고 올라오다가 갑자기 가슴통증이 찾아왔다. 이런 제길. 좀더 열심히 운동을 해야겠다.

종종

번역을 하다보면 빈도표시를 하는 부사를 어떻게 번역할까 고민스러울 때가 있다. 많은 학생들이 often이라는 말이 나오면 기계적으로 '종종'이라고 번역하는데, 나는 이 표현을 발견할 때마다 무조건 다른 표현으로 고치라고 표시해준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가장 큰 적은 '기계적 코드변환'이다. 무슨 말인지도 이해하지 못하고 번역을 할 거라면, 구글번역에게 맡기지 왜 사람에게 맡기겠는가? 지금은 왠만한 번역가보다 구글이 훨씬 뛰어난 번역결과물을 내놓는다. Gemini는 빈도부사의 발생확률을 다음과 같이 알려준다.  빈도 부사 대략적인 빈도 (%) 대략적인 번역 Always 100% 항상, 언제나 Usually 90% 보통, 대개, 특별한 예외가 없는 한 거의 항상 Normally / Generally 80% 일반적으로 Often / Frequently 70% 자주, 흔히 Sometimes 50% 가끔, 때때로, 반반 Occasionally 30% 아주 가끔 Seldom / Rarely 10% 드물게, 좀처럼 ~않는 Hardly ever 5% 거의 ~않는 Never 0% 전혀 ~않는 이 수치에 맞게 적절한 한국어표현을 궁리해서 번역하면 자연스러운 문장이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