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또는 노르웨이의 숲 또는 노르웨이산 가구
노벨문학상 후보로 늘 거론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를 이제서야 읽었다. 작품의 명성과 인기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소설은 잘 읽지 않아서 읽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번 주 독서모임 독서토론주제가 되어서 겸사겸사 읽었다.
기대했던 문학적인 성과보다는 에로소설, 아니 포르노소설 못지 않은 급진적인 이야기 전개가 상당히 재미있었다. 아니 이렇게 노골적이고 발칙한 섹스이야기를 그토록 걸작이라고 사람들이 읽어댔던 건가? 지금은 50이 넘어서 그다지 감정의 소용돌이가 크기 않지만 20대에 읽었다면 어떤 의미로나 상당한 휴유증을 겪었을 것 같다.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 읽었던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이 떠올랐다. 정말 찌질한 지식인들의 위선과 섹스놀음을 그린 소설인데, 그 당시 센세이션했던 작품이다. 《상실의 시대》보다 훨씬 두꺼운—700쪽이 넘는—분량이었는데,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 책 역시 허무, 상실, 소통불능, 무기력, 냉소 같은 주제를 담고 있었는데, 《상실의 시대》 역시 비슷했다. 물론 《경마장 가는길》의 주인공은 30살 정도 되었기에 별다른 이질감은 느끼지 못했지만, 《상실의 시대》에서는 주인공이 겨우 17-20살밖에 되지 않아서 문화적 이질감이 있었다.
가만히 돌아보면, 대학 다닐 때가 그래도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이 어설펐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대학에 들어간 나는 또래 아이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도 몰랐고, 옷 입는 것도 어색했고, 걸음걸이도 자신이 없었다. 나의 모든 것이 대학캠퍼스라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온통 흔들거릴 뿐이었다. 입학을 하고 한 달 남짓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격렬한 가두투쟁에 어설프게 발을 들여놓았다. 물론 나의 반골기질과 어느 정도 맞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의를 위해서 많은 학생들과 함께 최루탄 속에서 구호를 외치고 거리를 뛰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은 나 자신의 무기력, 나약함, 소통불능을 손쉽게 감춰주었다. 나는 더 이상 개인적으로 호명될 일이 없었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경마장 가는 길》이나 《상실의 시대》같은 "부르주아적-반동적 허무주의 사상"에 물들지 않고 대학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군대를 제대하고 난 뒤, 나 역시 찌질한 복학생 중 하나가 되어 후배여학생들을 괴롭혔지만.)
젊은 시절 '상실'은 무척 큰 의미였다. 하지만 이제와 돌아보면 어떤 삶을 살아가든, 누구나 현실 속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의 길을 선택한다는 것은 곧, 다른 길은 포기한다는 것이다. 뭐 구태여 '상실의 시대'라고 떠들 일이 있는가? 인생이란 늘 선택하는 것이고, 따라서 늘 포기하는 것이고, 그러니까 인생 자체가 늘 상실하는 것일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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