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친구를 보내며

어떤 이유에선지 젊은 시절 그토록 친근했고 함께 즐거움을 나누고 같은 꿈을 꾸었던 친구였지. 물론 그러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기 위해 서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파악하고 서로 맞춰가면서 배려해야 했지만, 또 한 편으로는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친구였지. 한때 우리 관계는 영원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느 순간 삐걱대기 시작했고, 소식이 뜸해졌고, 거리를 두기 시작했지. 하지만 지나온 세월 덕에 인간관계가 얽히면서 다시 마주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고, 그러면 또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어색한 웃음을 띄며 눈인사를 하고 별 영양가 없는 말을 한두 마디 주고 받으며 안부를 전하지. 왜 동기모임을 하면서 나한테는 연락을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면서도 궁금하지 않은, 답을 알고 싶으면서도 답을 알고 싶지 않은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빠르게 지워버리지. 어떤 사람과 가깝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남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 젊은 시절 나는 그것이 '친구'라는 허울좋은 이름 아래, 당연하게 주어진 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말과 행동이 하나 둘 모두 머릿속 카르마-엑셀차트에 기록되고 있었다. 그 결과값을 정산하였을 때 앞으로 도저히 뒤집을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엄청난 손실을 기록하였다면 하루라도 빨리 손절매를 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관계도 유한하고 시간도 유한하고 감정도 유한하기 때문에 이제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겨질 때는 하나씩 정리해나가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다. 갈수록 외로워진다.

시간의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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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va에서 무료로 공개한 Affinity라는 출판디자인소프트웨어를 활용하여 The Teacher's Grammar of English를 편집하고 있다. 영어문법책이다보니 디자인요소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폰트 설정에서부터 줄간격과 박스, 아이콘, 그림도 들어간다. 무엇보다 제한된 지면 안에 콘텐츠가 적절하게 배치되어야 하기 때문에 페이지나눔에 맞춰 글자수를 변경하거나 글의 순서 자체를 다시 배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프로그램 사용법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Gemini의 도움을 받아 기능을 하나씩 익혀가며 작업을 했다. 벌써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으니 프로그램 사용법이 이제 좀 익숙해졌고, 벌써 200페이지 정도 완성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제 완성한 분량은 전체 분량에서 고자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속도가 난다고 하더라도 최소 1달은 더 걸릴 것으로 여겨지고, 이 책말고도 300페이지 정도되는 Teaching Guide 별책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가을이 되어야 완성될 것 같다. 몸도 바쁘고 마음도 바쁘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작업을 끝내기 위해 저장하려고 하면 프로그램이 갑자기 '에러'가 발생하여 저장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띄우는 것이다. 온갖 수를 써보았지만 결국 작업한 분량을 날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2시간 정도 작업분량이었지만, 그 다음에는 5시간, 오늘도 일요일 낮에 출근하여 5시간 작업을 했는데, 모두 날리고 말았다. Gemini의 응급처방에 따라 파일을 살리기 위해 노력을 했으나 결국 살리지 못했다. 너무 허탈하다. 예전에 번역을 시작했을 무렵, 클라우드 서비스가 아직 없던 시절 이런 경험을 자주했다. 하루 작업한 원고가 날아가기도 하고 며칠 작업한 원고도 날아가기도 했다. 어떤 번역가는 두 달 동안 번역한 책 한 권을 몽땅 날려버렸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 현실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 그냥 미쳐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힘껏 소리...

인동고등학교 특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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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7월 13일 구미에 있는 인동고등학교 특강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강의를 하려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창비교과서에서 기획한 학교특강이었는데, 나는 번역가로 초빙되었다. 처음 특강주제는 '전문가들에게서 듣는 진로교육'이어서, AI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번역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없을 것 같았고, 또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말리고 싶을 뿐이기에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지난주 이틀에 걸쳐 프레젠테이션과 프린트물을 제작하였다. 처음에는 고등학생들에게 필요할 것이라 여겨지는 '정보구조'에 대해 설명할 생각이었지만, 너무 학원강의 같아질 것 같아서 '번역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을 앞에 삽입하였다. 이 내용은 《갈등하는 번역》 에필로그에 썼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내용을 좀더 일관성있게 전개하기 위해 강의의 키워드를 '협력'으로 잡았다. 번역하기: 번역문 단순한 코드전환이 아니라 이해를 거쳐야 하는 작업이다.  번역가의 역할: 어드레서와 어드레시의 개념 설명. 저자와 독자와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텍스트 속에 구현되어있는 협력의 원리들: 영어를 지배하는 정보구조의 원리. 사이사이에 공부하는 데 응용할 수 있는 유용한 팁을 넣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물론 현실은 달랐다. 일단 KTX 김천(구미)역에 12시 15분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난 11시 55분에 기차에서 내렸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여유를 즐길 요량으로 들뜬 마음에 기차역에 나왔는데, 뭔가 이상했다. 나는 ITX를 타고 왔고, 분명히 김천역에 내렸다. 기다리고 있기로 한 창비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했더니, 김천역과 다른 역이란다. 김천(구미)역은 KTX만 서는 역이라고. 헉. 황급히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기사는 금방 간다고 했지만, 20분 넘게 걸렸다. 덕분에 다른 초빙강사들은 버스에서 5분 이상 기다리고 있었다. 민망...

상실의 시대 또는 노르웨이의 숲 또는 노르웨이산 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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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후보로 늘 거론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를 이제서야 읽었다. 작품의 명성과 인기는 익히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소설은 잘 읽지 않아서 읽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번 주 독서모임 독서토론주제가 되어서 겸사겸사 읽었다. 기대했던 문학적인 성과보다는 에로소설, 아니 포르노소설 못지 않은 급진적인 이야기 전개가 상당히 재미있었다. 아니 이렇게 노골적이고 발칙한 섹스이야기를 그토록 걸작이라고 사람들이 읽어댔던 건가? 지금은 50이 넘어서 그다지 감정의 소용돌이가 크기 않지만 20대에 읽었다면 어떤 의미로나 상당한 휴유증을 겪었을 것 같다. 군대에서 휴가 나와서 읽었던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이 떠올랐다. 정말 찌질한 지식인들의 위선과 섹스놀음을 그린 소설인데, 그 당시 센세이션했던 작품이다. 《상실의 시대》보다 훨씬 두꺼운—700쪽이 넘는—분량이었는데,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다. 그 책 역시 허무, 상실, 소통불능, 무기력, 냉소 같은 주제를 담고 있었는데, 《상실의 시대》 역시 비슷했다. 물론 《경마장 가는길》의 주인공은 30살 정도 되었기에 별다른 이질감은 느끼지 못했지만, 《상실의 시대》에서는 주인공이 겨우 17-20살밖에 되지 않아서 문화적 이질감이 있었다. 가만히 돌아보면, 대학 다닐 때가 그래도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이 어설펐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대학에 들어간 나는 또래 아이들과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지도 몰랐고, 옷 입는 것도 어색했고, 걸음걸이도 자신이 없었다. 나의 모든 것이 대학캠퍼스라는 장소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온통 흔들거릴 뿐이었다. 입학을 하고 한 달 남짓 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격렬한 가두투쟁에 어설프게 발을 들여놓았다. 물론 나의 반골기질과 어느 정도 맞기도 했지만, 어쨌든 대의를 위해서 많은 학생들과 함께 최루탄 속에서 구호를 외치고 거리를 뛰어다닐 수 있다는 사실은 나 자신의 무기력, 나약함, 소통불능을 손쉽게 감춰주었다. 나는 더 이상 개인적...

K-pop 아이돌의 무대를 보면서

뉴진스의 무대를 볼 때마다 하니라는 멤버가 눈에 들어온다. 특별하게 튀지도 않으면서 혼신을 다해 자신이 맡은 역할을 다하는 모습이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K-pop 아이돌그룹의 칼군무를 생각해보면, 누구 하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는 음악가들을 볼 때마다 드는 느낌 역시, 튀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세련되고 섬세하다는 것이다. '사회화'가 매우 잘 되어있는 인간이다. 그래서 혼자 무언가를 하기보다, 그룹댄스나 그룹연주 같은 '협동예술'을 한다는 것은 개인에게 뭔가 특별한 습관이나 태도를 심어줄 것 같다. 그래서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어릴 때부터 그룹 연주나 그룹 댄스와 같이 **'타인과 호흡을 맞추는 훈련'**을 하는 것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넘어 사회적, 정서적으로 매우 중요한 태도와 습관을 형성해 줍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핵심적인 몇 가지를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자기 조절'과 '전체 흐름'을 읽는 태도 그룹 활동의 핵심은 내가 아무리 잘해도 남보다 빠르거나 튀면 전체가 망가진다는 점입니다. 억제와 조절: 내가 더 크게 연주하고 싶거나 더 돋보이는 동작을 하고 싶어도, 전체의 균형을 위해 나를 낮추고 박자를 맞추는 법을 배웁니다. 경청과 관찰: 연주자는 옆 사람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무용수는 옆 사람의 동선을 눈으로 쫓아야 합니다. 이는 타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깊은 **집중력(Mindfulness)**으로 이어집니다. 2. '책임감'과 '상호 의존성'의 습관 나의 실수가 그룹 전체의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경험은 강력한 책임감을 심어줍니다. 역할 완수: "내가 내 몫을 하지 않으면 팀이 멈춘다"는 인식을 통해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이 몸에 뱁니다. 공동체 의식: 내가 힘들 때 동료의 도움을 받고, 동료가 흔들릴 때 내가 박자를 잡아주는 과정을 통해 **'함께일 때 더 ...

소통불능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맺어주는 다리가 되는 소통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자신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의미와 정보 중에서 일부를 말로 표현해야 하는데, 어느 부분부터 말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하는 문턱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많은 정보를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이미 이해하고 있거나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표로 전환하는 문턱이 높을 것이고, 반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기표로 전환하는 문턱이 낮을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기질에 따라 기표전환문턱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상황은 구체적으로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대화내용 field: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느냐? 대화상대 tenor: 누구와 이야기하느냐? 대화방법 mode: 어떤 방법으로 이야기하느냐? 사실 이 따분한 소통이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오늘날 일상적인 대화도구가 된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가끔 경험하는 어색한 분위기에 대해 좀더 거리를 두고 생각해보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더 가깝게 연결해준다는 도구가 오히려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나의 경험을 기초로 정리해본다.  field: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가 다를 수 있다. 내가 관심없는 주제에 대해 모두들 떠들고 있을 때 가끔은 대화에 참여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대화에 참여하든 참여하지 않든 자발적 선택이지만, 소통이라는 것 자체가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나도 한 마디 거들게 마련이다. 하지만 관심없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겉돌기 마련이고 무리하게 주제전환topic shift를 시도하다가 원망을 사기 쉽다. tenor: 카카오톡에서는 현실의 관계가 그대로 전이된다. 물론 카카오톡은 모든 말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점에서 말을 조심해야 한다. 특히 현실에서 매우 가까운 사람과 카카오톡을 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가깝다고 말을 막했다가 오해를 살 수도 있고, 문제가 될 수도 있...

방구석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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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를 돌아보면 가장 도파민에 절여진 사람 중에 화가들을 빼놓을 수 없다. 폭발하는 창의성을 부여받은 댓가로 자기파멸적인 도파민의 늪에서 평생을 허덕이며 살아가야 하는 저주를 받은 인간들이다. 뛰어난 창의성은 도박과 다를 바없는 극단적인 모험심을 자극한다. 스스로 자각하지 않는 모티브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이들이 스스로 추동해낸 모티브에 감화되는 순간 방구석에 처박혀 몇날 며칠 그림만 그린다. 며칠 굶어도 배가 고프지 않다. 이들에게 사회적 관습과 규범, 경제적 성취는 바람 앞 등불처럼 가치없는 허상일 뿐이다. 끓어오르는 욕동에 충실하고 자기파멸적인 사랑을 하며 뒤죽박죽 살아가다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다. 그래서 화가들의 이야기는 인간의 삶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다. 평범한 사람들이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삶을 직접 구현한다. 그런 이야기만 모아놓은 책이 어찌 재미있지 않을 수가 있을까? 출간된지 8년 만에 40만부가 팔렸다는 선전문구가 납득이 되는 책이다. 오늘 독서모임 주제책으로 선정되어 읽었는데, 정말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