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

올해 독서모임에 내가 추천한 세 권 중 하나. 오늘 아침 독서모임에서 발제했다.

표지에 실린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하여, 어떤 내용인지는 자세히 보지도 않고 추천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화제는 다음과 같다.

문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 주제를 가지고 현재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문명의 이기들을 맨바닥부터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설명한다. 물론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작동원리나 기계적 구조도 알아야겠지만, 그보다 그런 기술이 왜 필요한지, 왜 중요한지, 그 바탕이 되는 기술의 발전과정도 알아야 한다. 결국 기술을 중심으로 인류문명이 진보한 역사를 보여준다.

물론 흥미를 끌기는 하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금세 지루해질 것이다. 온갖 지식과 기술의 목록을 늘어놓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재미있는 서사장치를 하나 삽입한다. 예컨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하다가 타임머신이 고장나 과거의 어느 시점에 조난당했다면, 그 시점부터 문명을 나 스스로 건설해 생존을 도모하라고 말한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생존매뉴얼이다.

물론 이러한 시나리오를 부과했음에도 그 분량과 방대한 지식의 목록에 압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조금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책을 읽어나간다면 잡다한 지식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 말발굽에 편자를 박는 이유, 농사를 지을 때 콩을 심어야 하는 이유, 송전선과 변압기의 기능, 숯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증류를 이용해 깨끗한 물을 얻는 방법 등 흥미로운 정보들을 알아가는 쏠쏠한 재미를 준다. 백과사전을 하루종일 들춰보던 어릴 시절에 이 책을 봤다면 정말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증기기관 발명과정.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서도 최소 2000년이 걸렸다.

저자는 문자기록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무수한 기술과 도구들이 두 번 발명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많은 기술이 고대인들이 발명했다가 잊혀졌다가 18-19세기에 이르러 다시 발명된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마치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듯이 로그기록을 촘촘히 문자로 기록하여 업데이트할 수 있다면, 문명을 훨씬 효과적으로 빠르게 발전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임머신 같은 서사장치를 도입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저자는 줄곧 유머와 위트를 가미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문화적 경계를 넘어오면서 가끔은 의도를 알 수 없는 유머, 시시한 유머,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유머가 내용을 어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부분은 번역자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좀더 한국독자들이 친숙하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개선할 수도 있을 듯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고도화된 문명의 품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원초적인 생존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사실 큰 문제는 아니다. 과거의 문명이전상태로 되돌아갈 타임머신이 발명될 일도 없고, 발명된다고 해도 내가 탈 일은 없을테니까. 또 이 거대한 문명이 한 순간에 무너질 일은 일어나지 않을테니까. 그런 상황은 가끔 《콘크리트유토피아》 같은 영화의 소재로만 쓰일 뿐이다. 그러나...

AI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할 일이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는 이 편리하고 안락한 시대에, 포근한 문명의 품 안에 갇혀 살다가 가장 기초적인 생존능력조차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원초적 불안은... 아마도 모든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 어른거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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