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의 삶 1

지금은 AI의 도움을 받아 번역을 그나마 조금 쉽게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번역은 배우기가 매우 까다로운 일 중 하나였습니다. 제대로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읽고 쓰는 능력 위에, 수준 높은 외국어 해독능력을 쌓아야 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비판적 탐구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능력 중 어느 것도 1-2년 노력한다고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긴 시간, 갈고 닦아야만 얻을 수 있는 고차원적인 능력이죠. 물론 이 세 가지 능력을 갖추었다고 해서 번역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난들, 번역을 하기 위해서는 한 자리에 앉아서 읽고 쓰는 작업을 긴 시간 쉬지 않고 반복수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가벼운 책이라고 해도 300쪽 정도 되는 책 한 권을 번역하려면 최소 6-7주는 걸립니다. 분량이 조금 되거나, 책 속에 담겨있는 정보가 복잡하거나 지식수준이 높은 책은 3개월이 넘어가기 일쑤입니다. 혹시 드라마 같은 데 나오는 멋진 번역가를 상상하시면 안 됩니다. 낮에는 한가롭게 산책을 하며 여유를 즐긴다던가, 노트북 하나만 들고 여행을 하면서 틈틈이 번역을 한다던가, 그런 그림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6-7주 동안 한 권을 번역하려면 하루 10시간씩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책상 앞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토요일 일요일 그런 것도 없습니다. 공휴일도 없고 쉬지 않고 일해야 합니다. 물론 경력이 쌓이고 어느 정도 일이 익숙해지면 작업속도가 조금 빨라지기는 하겠지만, 극적으로 빨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루 8시간 정도만 일해서 마감을 할 수 있다면, 그나마 자리잡은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번역을 한두 권하고 나면, 절반 이상은 때려 칩니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삶이 피폐해지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시간관리를 해야 하는데, 이런 생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계획대로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밀린 작업을 따라잡기 위해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일을 하다보면...

길 잃은 시간여행자를 위한 문명 건설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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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독서모임에 내가 추천한 세 권 중 하나. 오늘 아침 독서모임에서 발제했다. 표지에 실린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하여, 어떤 내용인지는 자세히 보지도 않고 추천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화제는 다음과 같다. 문명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이 주제를 가지고 현재 우리가 누리는 모든 문명의 이기들을 맨바닥부터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설명한다. 물론 그것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작동원리나 기계적 구조도 알아야겠지만, 그보다 그런 기술이 왜 필요한지, 왜 중요한지, 그 바탕이 되는 기술의 발전과정도 알아야 한다. 결국 기술을 중심으로 인류문명이 진보한 역사를 보여준다. 물론 흥미를 끌기는 하겠지만,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금세 지루해질 것이다. 온갖 지식과 기술의 목록을 늘어놓는 것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재미있는 서사장치를 하나 삽입한다. 예컨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를 여행하다가 타임머신이 고장나 과거의 어느 시점에 조난당했다면, 그 시점부터 문명을 나 스스로 건설해 생존을 도모하라고 말한다. 제목 그대로 이 책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생존매뉴얼이다. 물론 이러한 시나리오를 부과했음에도 그 분량과 방대한 지식의 목록에 압도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럼에도 조금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책을 읽어나간다면 잡다한 지식을 풍부하게 얻을 수 있다. 말발굽에 편자를 박는 이유, 농사를 지을 때 콩을 심어야 하는 이유, 송전선과 변압기의 기능, 숯을 얻을 수 있는 방법, 증류를 이용해 깨끗한 물을 얻는 방법 등 흥미로운 정보들을 알아가는 쏠쏠한 재미를 준다. 백과사전을 하루종일 들춰보던 어릴 시절에 이 책을 봤다면 정말 재미있게 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증기기관 발명과정. 열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나서도 최소 2000년이 걸렸다. 저자는 문자기록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무수한 기술과 도구들이 두 번 발명된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많은 기술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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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들어가기 전 공장을 다닐 때, 나도 정주영처럼 큰 돈을 버는 재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던 적이 있다. 서울역이나 영등포역 앞에 갈 때마다 리어카에서 파는 자기계발서들을 사서 읽었다. 미국책들을 날림으로 번역한 책들이었다. 30살, 40살 50살에 이룰 업적을 계획했고, 그때마다 소유한 자산을 액수로 써놓았다. 얼마전 넷플릭스에서 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서 나온 것처럼 우리 세상에 "멀티버스"가 존재한다면, 그 때 다른 길을 선택했다면 지금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상상한다. 물론 그런 상상을 진지하게 한다면, 현실이 행복하지 않다고 느낀다는 뜻일게다. 영화 속 에블린이 그렇고, 내가 그렇다. 대학을 가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나의 처지와 상황을 좀더 주체적으로 받아들였다면, 좀더 행복한 삶이 펼쳐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러기에는 내 앞에 펼쳐진 선택지가 너무 많았다. 물론 그 뒤에도 수많은 선택을 했고, 그 결과로 지금 이 상황에 도달했을 것이다.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얼핏 보기에 좋은 것 같지만, 잘못 판단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고 남의 시선과 시류에 휩쓸리기 쉽다는 뜻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거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할 때 비로소 목숨을 건 성장과 발전이 시작된다. 그렇게 우리는 인생의 가능성을 줄여나간다. 이제 선택지는 매우 좁혀졌다. 마지막 하나가 남을 때까지 좁혀갈 것이다. 선택하는 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무수한 선택지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나머지 선택지는 포기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무수한 선택을 했다는 뜻은, 나에게 열려있던 수많은 가능성을 포기했다는 뜻이다. 갓태어난 아기들이 사랑스러운 것은, 앞으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둘 나이를 먹으면서 선택지는 줄어든다. 나의 길이 아닌 것은 포기한다. 천진난만하던 얼굴이 하나둘 흠집이 가고 구겨진다. 이제 나는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얼마 남아있지 않다. 멀티버스는 개뿔.

2륜차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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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뉴스에서 김정기화백이 프랑스에서 리얼타임 드로잉쇼를 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고 감동을 받았는데 ,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세상을 떴다는 뜬금 없는 뉴스가 나왔다. 이제서야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화백이 새상을 뜨다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찾아보니 콜로소에 화백이 남겨놓은 온라인 드로잉클래스가 있어서 거액을 들여 구입했다. 구입해놓고 1년 넘게 묵혀 놓다가 이제라도 주말에 한 강좌씩 익혀나가고 있다. 오늘 강의는 5강 "2륜차 그리기"였다. 2시간이 넘는 강의를 들으며 그린 그림을 올린다.

창조성과 낙관성

몇 년 전 '노동자들의 특유의 낙관성'이라는 말을 들었다. 자본가나 유산자들은 염세적인 반면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무산자들, 자기 손으로 무엇이든 직접 만들어내 먹고 사는 노동자들은 세상을 비관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누군가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노동과 낙관적인 태도는 과연 상관관계가 있을까? 맞는 말 같기도 하고 뭔가 틀린 말 같기도 한 이 명제는 오랫동안 나의 뇌리를 맴돌며 화두가 되었다. 그러다 뭔가 초점이 잘못 맞춰졌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낙관성은 '먹고 사는 노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무엇이든 직접 만들어내'는 것에서 나온다. 이것은 현대적 의미의 노동 labor 이 아니라 고전적인 노동 work 을 말하는 것이다. work는 '노동'보다는 '창조'에 가까운 말이다. 무언가 새로운 길을 만들어내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실패하더라도, 이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무수한 길 중 하나의 결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테스트해보지 않은 도전기회가 99개 남아있기 때문에 좌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되려면, 창조적이어야 한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나 스스로 상상하고 구현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낙관적일 수밖에 없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자살하지 않는다. 부동산에 목을 매는 사람들, 부동산으로 편안하게 부를 만들어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 사람들은 대개 창조적이지 못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낙관적일 수 없다. 비관적이고 염세적인 사람들에게 기존의 질서는 유일한 구세주다. 그 틀 안에서, 정해준 방식대로, 열심히 기어올라,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것이 최상의 락 樂 이고 보람이다. 여기서 추락하면 삶의 의미가 사라진다. 자살을 선택한다. 우리나라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어떤 난관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창조성 때문이지 않을까? 오랜 역사를 통해 파괴와...

곶감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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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유튜브에서 곶감을 만드는 것을 보고 나도 한 번 도전해보기로 했다. 곶감용 고봉시 두 박스를 G마켓에서 6만원 정도에 구매하고 곶감걸이는 2만원 정도에 구매했다. 이 정도 돈을 쓰고 곶감 130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수지맞는 일이지만, 감을 일일이 깎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2시간이 넘어가니, 이 고생을 하느니 사먹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완성된 곶감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상상하며, 감을 깎고 곶감걸이에 걸고 나니 5시간이 넘게 걸렸다. 처음에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후반부에는 요령이 생겨 속도가 붙었다. 역시 단순반복노동은 머리속을 깨끗하게 비워준다. 이제 곶감을 먹기 위해서는 2주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자연과 시간이 만들어주는 음식 앞에 나도 모르게 경이로움과 겸손함을 느낀다. 곶감이 제대로 만들어지려나? 한껏 기대가 된다.

2026년 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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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대교 아래 한강변에서 본 일출 2026년 1월 1일 아침 6시 30분 일어나 행주산성에서 일출을 보러 가기로 했다. 몇 년 전 속초에서 1월 1일 동해 일출을 보러 간 적이 있는데, 차도 너무 막히고 숙박도 너무 비싸서 여행으로 얻은 감흥 대비 비용이 너무 컸다. 올해는 지음이가 왠일인지 새해일출을 보고싶다고 하여 어디로 갈까 고민하던 중 집에서 가까운 행주산성 일출이 볼만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집에서 차로 15분 밖에 안 되는 곳이니 여유있게 가면 되겠다 싶어 6시 50분 정도 출발했는데, 아...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었구나... 금방 깨달았다. 행주산성 초입부터 차가 많아지더니 막히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차를 댈 주차장을 찾지 못해 다시 집으로 가야 하나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러다 거의 행주산성길 거의 마지막 지점에서 운좋게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을 겨우 찾았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행주산성에 입장할 수도 없었다. 일출을 보러 온 사람이 너무 많아 입장을 통제한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나 망설이다가, 사람들이 많이 가는 쪽으로 일단 따라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바로 위 사진을 찍은 곳이다. 일기예보상 일출은 7시 48분이었지만, 10분이 지나도 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는 해가 안 보이는가보다...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 8시 정도 되었을 때 누군가 만세를 불렀다. 한강가로 최대한 나가니 행주산성 언덕 뒤로 해가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2026년 새벽, 부푼 꿈을 안고 한 해를 맞이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소중한 바람이 모두 이뤄지기를 바란다. 나의 올 한 해 개인적인 소망은 출판 사업매출과 순익을 끌어올려 성장궤도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더욱 화목한 가족이 되길 바란다. 해 뜨는 것을 보고 나서 '그 유명한' 행주산성 원조잔치국수를 거의 한 시간 줄을 서서 먹었다. 맛은 별로 없지만 양은 무지 많이 준다. 집에 돌아오니 10시가 조금 넘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