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과잉의 시대

물론, 내가 자라던 시절은 개개인의 정체성을 억압하는 시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것을 획일적인 기준에 맞출 것을 강요받았다. 사실상 명령과 복종이 미덕처럼 여겨졌다. 그러한 시대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억압적인 문화의 폐해를 잘 알고 있기에 지금은 아이들을 자유롭게 키우고 개개인의 개성을 맘껏 발휘할 수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그런 노력의 바람직한 결과가 오늘날 만개하고 있다. 바람직한 상황이다. 하지만 내란을 모의하였다가 실패한 반동분파들이 사회혼란을 획책하는 상황에서, 또 그들이 '정체성'과 '다양성'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존립기반 삼아 기생하고자 하는 상황에서, 과연 정체성과 다양성이 무작정 '선'인가 하는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실제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극우정치가 화두가 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하는 개념으로 '정체성정치'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GPT-5는 정체성정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의 정체성정치(Identity Politics)는 전통적인 계급·이념 중심 정치와 달리, 공유된 집단 정체성을 기반으로 정치적 행동을 조직하는 방식입니다. 예: 여성운동, 민권운동, LGBT 운동, 탈식민 운동, 민족주의 운동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남. 역사적 배경 1960~7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 페미니즘, 흑인 해방운동 등에서 개념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 1980년대 이후: 새로운 사회운동(New Social Movements)의 흐름 속에서 확산. 2010년대 이후: 미국의 백인 정체성 정치 등 일부 집단에서 극단화된 형태로 나타남. 특징과 논쟁 긍정적 측면: 소수자 집단의 경험과 권리를 정치적으로 가시화하고, 억압 구조에 맞서 권한을 부여하는 역할. 비판적 측면: 집단 간 갈등을 심화시키거나, 보편적 정치 담론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 좌우 모두 존재: 좌파적 정체성정치(페미니즘, 탈식민 운동)뿐 아니라, 우파적 정체성정치(민족주의, 종교적 정체성 ...

우리에게 찾아온 영원한 역사적 부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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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세기 고구려가 만주를 향해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이 5호16국 — 남북조로 분열되어 한반도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7세기 신라가 가야-백제-고구려를 차례대로 멸망시키고도 고구려영토를 고스란히 빼앗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당이라는 강력한 국가로 통일되어있던 중국이 개입했기 때문이다. 10-11세기 잃었던 대동강 이북영토를 고려가 회복하고 주체적인 국가로 번영할 수 있었던 것은, 요나라-금나라로 인해 중국이 분열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원-명-청으로 이어지는 강성한 국가가 전체 중국을 통치하는 동안 우리나라는 계속 간섭을 받았고, 주체적인 외교를 할 수 없었다. 지금 중국은 하나로 통일되어 강력한 국가를 유지하고 있다. 역사적인 교훈에 비춰보자면 우리나라는 팽창기보다는 수축기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광의 역사를 회고하며 중국이 언젠 쪼개질까 내심 기대하는 한국인이 많다. 나도 물론 그러한 헛된 망상을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중국은 이미 분열되어있다 하지만 지난 경주 APEC에서 이재명대통령이 강력한 리더십과 협상력으로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을 (약간 과장을 하자면) 쥐락펴락하는 모습을 보면서, 역사적 지리적으로 우리 운명을 지배했던 문법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일단, 지리적 조건으로만 따진다면 거대한 중국이라는 존재는 우리이게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통신기술/교통기술의 발달로 인해 지리는 100년, 200년 전과 달리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은 중국이 통일되어있든 말든, 미국, 러시아 같은 강대국들까지 우리에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우리나라 역시 거꾸로 그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원-명-청과 같은 강력한 통일중국이 우리를 압박하는 상황보다는, 여러 국가 사이에서 영리한 외교력과 강력한 군사력으로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했던 고려-남북조 상황에 훨씬 가깝지 않을까? 기탄과 송이 고려의 군사적 지지를 얻기...

삶이란...

누구나 태어났을 때, 그 앞에 열린 가능성은 무한하다. 어릴 적 나는 마음먹은 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들어가고, 다른 아이들과 점점 비교하면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둘 포기하기 시작한다. 세상에 대해 배우면서 새로운 길을 찾고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선택의 폭은 좁아지고 더 많은 것들을 포기한다. 내가 포기한 것들은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은 그렇게 빚어진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것은 나의 길, 내 것... 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조차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마음이 아프지만 그동안 내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들을 놓아준다. 포기한다. 점점 나에게 주어진 길은 좁아진다. 나는 겁을 먹는다. 이제 많은 것을 욕심낼 여유가 없다. 단 하나 좁은 골목... 단 하나 실오라기... 만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나머지 모든 것들은 포기한다. 하지만... 그것마저 위태롭다. 결국 가능성은 사라지고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순간이 온다... 마침내 나 자신마저 포기해야 하는 순간 ... 붓다가 된다.

마지막 혼을 불살라 교정작업

지난 11월 말 《비판적 사고의 힘》을 계약하고 번역작업을 시작하여, 편집과 디자인작업을 거쳐 마지막 교정작업을 하고 있다. 디자인작업을 기다리느라 중간에 한 달 정도는 다른 작업을 한 것을 고려하더라도 이 책에만 꼬박 6개월을 쏟아부었다. 어쩌다보니 12.3 내란이 벌어지고 6.3 대선으로 민주공화정을 되찾은 기간과 거의 겹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을 작업한 기억은 음울하고 화가 나는 감정으로 뒤덮혀있다. 원래는 3월 출간을 계획하였다. 늘 그렇듯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다 4월, 5월, 6월로 미뤄지다... 결국 7월이 되고 말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나의 업무계획이 현실과 동떨어져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월 말에는 무조건 내야겠다고 생각하고 마지막 인디자인 편집본을 받아서 최종적으로 맞춤법 오류를 바로잡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다시 보니 여기저기 자꾸 고칠 것이 눈에 띈다. 시간은 계속 늘어나고 출간일정도 밀린다. 안 돼! 이제 끝내야 돼! 사실 이러한 경험은 책을 낼 때마다 매번 반복되었다. 번역부터 편집과 교정... 재교정, 3교, 4교... 같은 원고를 몇 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정말 지루하고 답답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과정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더 이상 고칠 건 없을 거야... 혼자만의 믿음을 세우고 그대로 원고를 인쇄소에 넘겨버린다. 아 이제 시원하다... 사실 그렇게 출간했던 책이 바로 《논증의 탄생》이었다.  책이 나오고 맨 처음 나온 독자의 반응은 어김없이 오탈자가 많다는 것이었다. 2쇄, 3쇄를 찍으면서 고치고 또 고쳤다. 물론 그렇게 수정할 기회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그때 기억을 되새기며 이 지루한 작업을 견디고 버틴다. 마지막 일주일만 더 견디며 원고를 수정하는 작업에 몰두하면, 책의 가치는 더 올라간다고 나 스스로 암시하며 작업에 매진한다. 더 집중하여 더 꼼꼼하게 마지막까지 버텨야 한다. 긴 산고 끝에 빛이 나는 걸작이 나오는 법이다.

21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60퍼센트 이상 압도적 득표로 이재명 대통령을 당선시켜 우리 사회의 주류를 교체하자.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최루탄과 지랄탄 세례속에서 백골탄을 피해 종로 명동 신촌 대학로를 뛰어다니며 노태우정권 타도 민자당해체를 외쳤다.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정권,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은 우리의 이상이었지만 사실 그것이 실현가능한 것일지는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이후 30년 사이에 민주당이 3번이나 집권했으나 군사정권 시절로부터 내려오는 공고한 기득권세력의 견제와 압박 속에서 민주세력은 여전히 사회의 비주류였다. 민주당이 기호1번으로 선거를 치르기 시작한 지 벌써 10년이 되어 가지만 그것 역시 민주당이 주류라는 증거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대통령선거는 우리 사회의 주류교체, 완전한 기득권 교체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 될 것이다. 수구잔당들의 어떠한 모략과 음모로도 뒤집을 수 없는 거센 민심의 물결 속에서 역사는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것이다. 이제 조국통일과 번영이 눈 앞에 펼쳐질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비주류가 아니다. 우리가 메인스트림이다.

기억, 꿈, 사상

칼 융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 기억, 꿈, 사상 》 을 읽었다. 이번주 독서모임 주제책이었기에, 다소 속도를 내어 읽었는데, 그러다보니 가끔은 무슨 내용인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채 스크롤하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기도 했다. (밀리의 서재 구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요즘에는 웬만하면 전자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역시 책은 처음이 어렵다. 더욱이 책을 시작하자마자 융은 자신의 어릴 적 꿈 이야기를 현실과 곁들여 이야기하는데, 유년시절 챕터를 거의 다 읽고나서도 무슨 맥락인지 정리가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결국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핵심포인트를 짚으며 이야기를 다시 구성해야만 했다. 하지만 학창시절을 넘어 대학시절 이야기에 들어가면서 조금은 쉽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내가 얄팍하게나마 알고 있는 융의 정신분석학 개념과 이론에 대한 뒷이야기가 나오는데, 읽을수록 흥미가 생겼고 책의 후반부에 다다라서는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궁금할 정도였다. 대학시절 몇 가지 융 심리학 입문서를 읽은 적이 있었기에, 융의 집단무의식, 원형, 동시성과 같은 개념들은 대략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과 이론들을 어떻게 떠올리고 정립해나갔는지 사상가의 입을 통해 직접 설명하는 이 책은 색다른 흥미를 전다. 서구인들, 특히 명석한 두뇌를 타고난 인물들이라면 어린 시절 예외없이 겪는 기독교 교리와 전통에 대한 의구심과 불화를 이 책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던 엄마 덕분에 나 역시 어릴 적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기독교의 비합리성과 무지함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심과 반발은, 어릴 적 나를 혼란스러운 의식과 몽상에 빠뜨렸고,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아직도 음울한 그림자에 덮여있다. 기독교를 부정하기 위해 나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잠시나마 철학과 종교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더욱 강렬한 기독교의 세례를 받고 자란 칼 융은 대학에 들어간 뒤 아예 이쪽 길로 쭉 나아갔고, 결국 분석심리학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소년이 온다

광주민중항쟁에서 목숨을 잃은 분들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지만, 그곳에서 살아난 이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생각해보게 되었다. 지옥같은 수용소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며 6개월 뒤 풀려난 주인공은 자신이 겪은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삭이며 살아간다. 그러다 길에서 우연히 수용소 동기 진수를 만난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겪은 비인간적인 경험을 간직한 채 소주로 달래며 서로 안쓰러워 하고 위로한다. 그 누구라도 견디기 어려운 트라우마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제대로 된 사회생활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두 사람. 결국 진수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오랜만에 읽은 한국 소설. 첫 챕터에서는 역사적 사실에 허구적 상상을 가미하여 사회적 의미를 이야기라는 틀을 활용하여 전달하는 소설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챕터가 바뀌면서 화자가 달라지고 관점이 바뀌고, 이야기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해나간다. 나의 뇌는 더욱 긴장하며 퍼즐을 맞춰 소설을 읽어나가야 했고, 흥미는 더욱 달아올랐다. 그렇게 6개의 챕터가 전개된다. 챕터가 바뀔 때마다 달라지는 화자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저자 내면의 목소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실로 오랜 세월 직접 발품을 팔아 취재하고 인터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예전에 신문과 뉴스에서 보았던 것들이다. 그 부조리한 사건들을 보며 분통을 터트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나는 기억한다. 저자는 그러한 사건들의 당사자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오랜 세월 그들과 이야기하며 자료를 모았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눈물흘리고 마음 아파했던 저자의 애절한 감정과 이해가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화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것 같았다. 단순히 방구석에서 머리만으로 이야기를 구상하여 쓰는 소설과 차원이 다른 작품이다. 노벨문학상의 가치에 빛나는, 우리 소설이다. 나는 가끔 나 자신이 기나긴 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