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꿈, 사상
칼 융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기억, 꿈, 사상》을 읽었다. 이번주 독서모임 주제책이었기에, 다소 속도를 내어 읽었는데, 그러다보니 가끔은 무슨 내용인지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채 스크롤하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읽기도 했다. (밀리의 서재 구독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요즘에는 웬만하면 전자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역시 책은 처음이 어렵다. 더욱이 책을 시작하자마자 융은 자신의 어릴 적 꿈 이야기를 현실과 곁들여 이야기하는데, 유년시절 챕터를 거의 다 읽고나서도 무슨 맥락인지 정리가 되지 않은 느낌이었다. 결국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핵심포인트를 짚으며 이야기를 다시 구성해야만 했다. 하지만 학창시절을 넘어 대학시절 이야기에 들어가면서 조금은 쉽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내가 얄팍하게나마 알고 있는 융의 정신분석학 개념과 이론에 대한 뒷이야기가 나오는데, 읽을수록 흥미가 생겼고 책의 후반부에 다다라서는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가 궁금할 정도였다.
대학시절 몇 가지 융 심리학 입문서를 읽은 적이 있었기에, 융의 집단무의식, 원형, 동시성과 같은 개념들은 대략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과 이론들을 어떻게 떠올리고 정립해나갔는지 사상가의 입을 통해 직접 설명하는 이 책은 색다른 흥미를 전다. 서구인들, 특히 명석한 두뇌를 타고난 인물들이라면 어린 시절 예외없이 겪는 기독교 교리와 전통에 대한 의구심과 불화를 이 책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던 엄마 덕분에 나 역시 어릴 적 비슷한 경험을 했다. 기독교의 비합리성과 무지함에 대한 자연스러운 의심과 반발은, 어릴 적 나를 혼란스러운 의식과 몽상에 빠뜨렸고,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나의 어린 시절 기억은 아직도 음울한 그림자에 덮여있다. 기독교를 부정하기 위해 나는 대학에 들어갔을 때 잠시나마 철학과 종교학에 심취하기도 했다. 더욱 강렬한 기독교의 세례를 받고 자란 칼 융은 대학에 들어간 뒤 아예 이쪽 길로 쭉 나아갔고, 결국 분석심리학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이뤄냈다.
칼 융이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면모도 곳곳에서 엿볼 수 있는데, 그는 정말 매력적인 현인의 모습이다. 자신의 업적이나 개인적 성취를 앞세우기보다는 정직하게 연구하는 겸손한 학자의 모습이다. 이 책 역시 칼 융의 자서전이라고 일컬어지나 그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그의 제자가 그의 곁에서 집필한 것이다. 칼 융은 스스로 자신이 자서전을 집필할 만한 위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제자가 작성한 원고를 보여주면 융은 꼼꼼하게 코멘트하고 수정했다고 한다.
프로이트와 교류하다가 결국 결별하는 이야기는 역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여기서 그려지는 프로이트의 인간적인 면모는 다소 괴짜 같은 인상을 준다. 물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이룬 업적을 생각한다면 전혀 흠이라고 생각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이 에피소드를 통해 칼 융의 인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칼 융이 진정한 학자의 표상과도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책을 읽으며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칼 융은 어릴적부터 꾸준히 꿈을 분석하였으며, 이 작업을 평생 계속했다는 것이다. 이 책의 3분의 1은 꿈 이야기인 듯하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만 읽었던 나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실이다. 물론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보다 훨씬 세련되고 깊이가 있고 지적이다.
언젠가 한 번 좀더 여유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자서전을 쓴다면, 이 책을 모범으로 삼아도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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