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소멸
Canva에서 무료로 공개한 Affinity라는 출판디자인소프트웨어를 활용하여 The Teacher's Grammar of English를 편집하고 있다. 영어문법책이다보니 디자인요소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폰트 설정에서부터 줄간격과 박스, 아이콘, 그림도 들어간다. 무엇보다 제한된 지면 안에 콘텐츠가 적절하게 배치되어야 하기 때문에 페이지나눔에 맞춰 글자수를 변경하거나 글의 순서 자체를 다시 배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프로그램 사용법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Gemini의 도움을 받아 기능을 하나씩 익혀가며 작업을 했다. 벌써 시작한 지 한 달 정도 지났으니 프로그램 사용법이 이제 좀 익숙해졌고, 벌써 200페이지 정도 완성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제 완성한 분량은 전체 분량에서 고자 3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앞으로 속도가 난다고 하더라도 최소 1달은 더 걸릴 것으로 여겨지고, 이 책말고도 300페이지 정도되는 Teaching Guide 별책까지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가을이 되어야 완성될 것 같다. 몸도 바쁘고 마음도 바쁘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작업을 끝내기 위해 저장하려고 하면 프로그램이 갑자기 '에러'가 발생하여 저장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띄우는 것이다. 온갖 수를 써보았지만 결국 작업한 분량을 날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2시간 정도 작업분량이었지만, 그 다음에는 5시간, 오늘도 일요일 낮에 출근하여 5시간 작업을 했는데, 모두 날리고 말았다. Gemini의 응급처방에 따라 파일을 살리기 위해 노력을 했으나 결국 살리지 못했다.
너무 허탈하다. 예전에 번역을 시작했을 무렵, 클라우드 서비스가 아직 없던 시절 이런 경험을 자주했다. 하루 작업한 원고가 날아가기도 하고 며칠 작업한 원고도 날아가기도 했다. 어떤 번역가는 두 달 동안 번역한 책 한 권을 몽땅 날려버렸다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 현실을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정, 그냥 미쳐버리고 싶은 심정으로 힘껏 소리를 지르고 그대로 방을 뛰쳐나갔다. 그 때를 생각하면 어떻게 그 시간을 살아냈는지 참으로 아득하다.
클라우드 서비스가 나오면서 그런 기억은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런데 또 다시 그 오랜 경험을 다시 하게 되다니, 아... 좌절과 절망... 컴퓨터를 던져서 부숴버리고 싶은 그 사납고 원시적인 감정을 다시 느낀다.
온갖 설정을 해도 저장에러는 해결되지 않는 것 같다. 매 시간 알람을 켜놓고 수동으로 저장을 하여 작업을 날리는 양을 최소화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출간이 늦어지면서 사업손익도 계속 악화되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출간을 해야 살아날 수 있다.
소멸된 하루를 벌충하기 위해 내일 아침,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원고를 처음 다듬듯이, 다시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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