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고등학교 특강
어제 7월 13일 구미에 있는 인동고등학교 특강을 다녀왔다. 오랜만에 강의를 하려니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창비교과서에서 기획한 학교특강이었는데, 나는 번역가로 초빙되었다. 처음 특강주제는 '전문가들에게서 듣는 진로교육'이어서, AI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번역가가 되고자 하는 학생'은 없을 것 같았고, 또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말리고 싶을 뿐이기에 무엇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하나 고민스러웠다.
불안을 달래기 위해 지난주 이틀에 걸쳐 프레젠테이션과 프린트물을 제작하였다. 처음에는 고등학생들에게 필요할 것이라 여겨지는 '정보구조'에 대해 설명할 생각이었지만, 너무 학원강의 같아질 것 같아서 '번역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을 앞에 삽입하였다. 이 내용은 《갈등하는 번역》 에필로그에 썼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준비한 내용을 좀더 일관성있게 전개하기 위해 강의의 키워드를 '협력'으로 잡았다.
- 번역하기: 번역문 단순한 코드전환이 아니라 이해를 거쳐야 하는 작업이다.
- 번역가의 역할: 어드레서와 어드레시의 개념 설명. 저자와 독자와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 텍스트 속에 구현되어있는 협력의 원리들: 영어를 지배하는 정보구조의 원리.
사이사이에 공부하는 데 응용할 수 있는 유용한 팁을 넣었다.
계획은 완벽했다.
물론 현실은 달랐다.
일단 KTX 김천(구미)역에 12시 15분까지 도착해야 하는데, 난 11시 55분에 기차에서 내렸다. 커피라도 한 잔 마시며 여유를 즐길 요량으로 들뜬 마음에 기차역에 나왔는데, 뭔가 이상했다. 나는 ITX를 타고 왔고, 분명히 김천역에 내렸다. 기다리고 있기로 한 창비직원이 보이지 않았다. 전화를 했더니, 김천역과 다른 역이란다. 김천(구미)역은 KTX만 서는 역이라고. 헉.
황급히 나는 택시를 잡아탔다. 택시기사는 금방 간다고 했지만, 20분 넘게 걸렸다. 덕분에 다른 초빙강사들은 버스에서 5분 이상 기다리고 있었다. 민망한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탑승...
학교에 도착했더니 초빙강사들끼리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차. 명함... 평소에 쓸 일도 없는 명함을 이럴 때는 꼭 놓고 온다. 어수룩한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데 내가 '번역가로 20 여 년 활동해왔다'고 소개했을 때 약간 놀라워하는 환호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뭣 때문에 그런거지? '번역가'라서? 아니면 '20 여 년'이라는 시간에? 아니면 보기보다 '나이가 많은 것 같아서?' 어쨌든 예상 밖의 좋은 기분을 느꼈다.
출판사와 학교에서 초대한 강사들이니 만큼 이력이 꽤 있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이름을 알고 있던 사람으로는 강원국작가와 유튜버 수상한 생선이 있었다. 또 프리랜서 아나운서, 천문학자, 작곡가, 삼성전자에 다니는 IT전문가, 시인, 소설가 등이 있었다.
수업시간에 맞춰 교실로 인도되었다. 남녀학생들이 20 여 명 앉아있었다. 나 자신에게 자신감을 가지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교탁 바로 옆에 컴퓨터가 켜져 있어서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는 동안 캔바에 로그인을 하고 프레젠테이션을 띄웠다. 그런데... 문서 안에 작성해놓은 영어단어들이 알 수 없는 한글로 바뀌어있었다. 자동번역이 된 것 같았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캔바에서 무언가 설정이 잘못되어있나 살펴보았지만 원인을 찾지 못했다.
어쨌든 바로 수업은 시작되었고, 그래도 그림은 그대로였기에 그런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버벅거리기도 하는데다가, 프레젠테이션도 엉망이어서 처음에는 헤맸던 것 같다. 그래도 조금 시간이 지나니 안정을 찾았지만 그래도 계획했던 것 만큼 매끄러운 수업은 아니었다.
종소리가 들렸다. 쉬는 시간이었다. 10분 쉬고 다시 시작한단다. 다행이다.
쉬는 시간에 폰에서 캔바 프레젠테이션을 PPT로 다운로드 받아서 컴퓨터로 옮겨 다시 열었다. 캔바에서 공들여 만든 애니메이션 효과는 다 작동하지 않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글자는 깨지지 않고 그대로 열렸다. 두 번째 수업에서는 정보구조에 대해서 설명을 했고, 몇 개 준비해간 퀴즈를 내고 맟춘 학생에게는 미리엄웹스터 보캐뷸러리빌더 책을 선물했다. 책 선물이 별로 달갑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상품을 거니 학생들이 열심히 참여하는 것 같았다.
수업을 마치고 김천(구미)역으로 돌아와 KTX 기차표를 구매하여 서울역에 도착하니 7시였다. 다시 하면 잘 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런 특강을 몇 번 해보았지만, 두 번째 기회는 오지 않더라.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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