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의 역습: 옮긴이의 글
어릴 적 시장에 가서 고기를 사오라는 심부름을 하던 일이 떠오른다. 정육점에 가면 아저씨가 고기를 잘라서 신문지에 싸준다. 그때는 고기가 다른 야채나 식료품에 비해 비싼 때라, 겨우 주먹만한 크기의 조그만 고깃덩어리 하나를 사기 위해 시장까지 먼 거리를 가야 했다. 고기는 매일 먹을 수 없는 소중한 음식이었다. 고기 맛을 보기 위해 조그만 불편은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고기를 들고 집으로 오면서 이 한 덩어리의 살점을 인간에게 주기 위해 어떤 소, 돼지가 피 흘리며 죽어갔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비싼 음식'인 고기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먹는 나에게 겸손함을 갖제 해주었다. 그렇게 품에 안고 온 고기는 국이나 찌게에 들어가 맛난 국물을 만들어냈다.
이제 우리는 더 잘 살게 되고 세상은 편리해졌다. 모든 것이 풍족해졌다. 무엇보다도 일주일에 겨우 한두 번 먹던 고기음식을 이제는 거의 매일, 쉽게 먹을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예전처럼 조그만 고깃덩어리로 많은 국물을 내는 음식보다는, '살점덩어리'들을 집어먹는 고기구이집들이 골목마다 들어찼다. 휘황찬란한 햄버거집들도 즐비하다. 단돈 천 원만 내면 고기가 푸짐하게 들어있는 햄버거를 먹을 수 있다. 너무도 잘 먹어 이제 사람들은 비만을 걱정한다. 고기는 이제 아무런 불편없이, 어디서나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다.
사람들은 이런 사태의 변화를 흔히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하려 한다. 돈이 많으면 음식도 풍요로운 것이 당연하고, 좋은 음식 배불리 먹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는 자연의 능력 내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모든 이들이 부자가 된다고 해서 모두 일 안하고 잘먹고 잘 살 수 없다. 우리 삶을 지탱해주고 경제적 '자원'을 공급하는 '지구'라는 범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마크 롤랜즈의 전투적인 동물해방론은 그래서 옳다. 사람들은 경제적인 논리—다시 말해, 탐욕의 논리로만 자연을 끝내 이용하려 한다. 탐욕에는 끝이 없다. 자연의 한계, 생태계라는 그릇의 크기는 무시한다. 마구 짓밟고 파괴하고 변형한다. 그 최전선에 우리의 먹는 문제가 있다.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신비감, 생명에 대한 경외감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제 인간들은 자본의 논리로 생명을 우리 이익에 맞게 조작한다. 마구 죽인다. 좁은 공간에 가두고 규격화한다.
살이 통통히 오르고 튼튼하게 생긴 소, 돼지가 최상급이다. 이런 '상품'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양의 향생제와 화학약품을 쓴다. 자연적인 조건을 모두 인공적인 조건으로 바꾼다. 깨끗한 철제시설에 최소한의 공간에서 최소한의 비용으로 동물들을 '생산'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얼짱, 몸짱 신드롬은 전혀 낯선 현상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생명을 그렇게 재단해왔다. 생명에 대한 우리 시선의 당연한 귀결이다. 다른 사람도, 자기 자신도 외형적 규격화를 하고자 한다.
광우병, 조류독감은 사실상 이러한 행위로 빚어지는 사소한 문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몇 달 전 신문에 유전자 조작을 통해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 소를 만들어냈다는 보도가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과학의 도발이다. 이런 사태를 일으킨 '동물공장' 체제에 대한 반성 대신에 우리는 아예 소를 바꿔버리고자 한다. 우리는 결코 뒤돌아보지 않는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모두 함께 사는 상생의 길인지 생각지 않는다. 끝없는 탐욕을 채우기 위햇 끊임없이 착취하고 파괴할 뿐이다.
우리가 먹는다는 행위는 곧 죽이는 행위다. 채식을 하든 육식을 하든, 결국 죽이는 행위다. 나는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이 아니다. '먹는다'는 행위의 소중한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먹는다는 것은 다른 생명을 죽여 내 생명을 살리는 방식이다. 동물을 먹지 않고 식물만 먹는다고 해서 이러한 죄의식이 줄어들 것이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음식을 먹기 전에 '나에게 먹히는 대상'보다 내가 존재적 가치가 더 큰지, 한번 냉철히 비교해보자. 우리가 먹는 행위가 지구를 황폐하게 만드는 행위가 아닌지 냉철히 판단해보자. 그 수많은 생명을 앗으면서 우리의 존재가치가 정당한지 한번 따져보자.
그것이 동물해방, 생명해방의 출발점이다.
2004년 4월 윤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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